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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을 땐 보이지 않던 것들: 50대 부부의 '느린 걸음'으로 다시 만난 전라권 여행 (전주, 여수, 군산)여행(숙박 맛집) 2025. 10. 1. 09:54반응형
아내와 함께, 우리의 '두 번째 신혼여행'
아이들 방학 숙제처럼, 혹은 빼곡한 출장 일정처럼 정신없이 다녔던 여행은 이제 끝났습니다. 갓난쟁이 손을 잡고, 칭얼대는 아이를 업고, 나중에는 훌쩍 커버린 자녀들의 뒷모습을 쫓아다니기 바빴던 지난 30년. 돌이켜보면 풍경보다 아이들 얼굴을, 음식 맛보다 식당의 유아용 의자 유무를 먼저 살폈던 날들이었습니다.
자녀들을 모두 키워 제 짝을 찾아 보내고 나니, 저희 부부에게는 고요한 적막과 함께 낯선 여유가 찾아왔습니다. 처음엔 그 어색함에 뭘 해야 할지 몰라 서로 멀뚱히 바라보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여행 갈까? 이번엔 정말 우리 둘만." 그 한마디가 저희 부부의 멈춰 있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했습니다.
이번 목적지는 맛과 멋의 고장, 전라권입니다. 젊었을 적 스치듯 지나갔던 곳들이지만, 이번엔 다를 겁니다. 빨리 보고 많이 찍는 여행 대신, 천천히 걷고 깊이 맛보며, 그 시절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발견하는 여행. 2박 3일간의, 저희 부부의 조금 느린 여행 일기를 시작합니다.

젊을 땐 보이지 않던 것들: 50대 부부의 '느린 걸음'으로 다시 만난 전라권 여행 (전주, 여수, 군산) 첫째 날, 전주: 맛의 깊이를 탐하고 멋의 여유를 걷다
▶ 테마: "청춘의 활기 속에서, 어른의 여유를 찾다"
우리 부부의 코스 (오전): 한복, 그리고 아내의 소녀 같은 웃음
전주 한옥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젊은 친구들의 활기가 온몸으로 느껴졌습니다. "우리 나이에 무슨 한복이람." 쑥스러워하는 저를 이끈 건 아내였습니다. 저희는 수백 벌의 한복이 곱게 걸린 대여점 '한복남'으로 들어섰습니다. 화려한 파스텔톤의 '테마 한복'은 젊은이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저희는 은은한 빛깔의 기품 있는 한복을 골랐습니다.
다행히 체격이 있는 저나 아내에게 맞는 큰 사이즈도 잘 구비되어 있었고, 직원분들이 친절하게 옷매무새를 만져주어 한결 편안했습니다. 어색할 줄 알았는데,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아내가 거울 앞에서 소녀처럼 웃더군요. 그 웃음 하나에 이번 여행은 이미 성공이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우리 부부의 코스 (오전): 경기 전, 역사의 숨결 속을 거닐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저희 부부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시끌벅적한 먹거리 골목이 아닌,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모셔진 경기 전이었습니다. 입구에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下馬碑)를 보니,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되더군요.
조선 왕조의 뿌리가 되는 공간의 고즈넉함은 한옥마을의 소란스러움을 단숨에 잠재웠습니다. 저희는 정전(正殿)을 둘러본 뒤, 그 유명한 대나무 숲길을 걸었습니다. 하늘을 가린 대나무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과 바람에 스치는 댓잎 소리. 아내와 말없이 손을 잡고 걷는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 나이대에 맞는 진짜 풍류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청춘의 활기 속에서 어른의 여유를 찾는 것, 그것이 저희가 전주에서 발견한 첫 번째 행복이었습니다.
50대 부부의 꿀팁 (점심): '가족회관'에서 찾은 진짜 전주의 맛
젊은 친구들처럼 길거리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기보다, 제대로 된 전주비빔밥 한 그릇을 맛보고 싶었습니다. 저희의 선택은 현지인들도 인정한다는 '가족회관'이었습니다.
자리에 앉자 놋그릇에 담긴 비빔밥이 나오기 전, 정갈한 반찬들이 먼저 상을 가득 채웠습니다. 무려 10가지가 넘는 반찬과 구수한 된장찌개, 그리고 화산처럼 부풀어 오른 뚝배기 계란찜까지. 마치 잘 차려진 한정식 백반을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사골 국물로 지었다는 밥알은 고소했고, 30여 가지의 신선한 나물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맛과 향을 온전히 뽐냈습니다. 비빔밥 한 그릇이 아니라, 전주의 '정(情)'과 '맛의 깊이'를 통째로 대접받는 느낌이었습니다.잠시, 담양에 들르다: 대나무 숲이 주는 위로
점심을 든든히 먹고 난 오후, 저희는 잠시 전주의 번잡함을 벗어나기로 했습니다. 차로 1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곳은 담양 죽녹원이었습니다. 성인 1인당 3,000원의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은, 그야말로 '치유의 공간'이었습니다.
총 2.4km에 달하는 8개의 산책로는 저희 부부의 느린 걸음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한여름의 열기도 대나무 숲 그늘 아래에서는 힘을 잃더군요. 높은 습도와 음이온이 가득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니, 그간 쌓였던 몸과 마음의 피로가 씻겨나가는 듯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1시간 30분가량 천천히 숲길을 걸으며, 복잡했던 머릿속을 비워내는 온전한 휴식을 누렸습니다.50대 부부의 꿀팁 (오후): '전망' 좋은 찻집에서의 쉼표
담양에서 돌아와 다시 전주 한옥마을로 들어서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습니다.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저희는 이름부터 마음에 쏙 드는 '전망'이라는 카페를 찾았습니다. 5층짜리 건물 위쪽에 자리한 이 카페에서는 이름 그대로 한옥마을의 기와지붕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름다운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따뜻한 대추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노을에 물드는 기와지붕을 바라보며, 아내와 오늘 하루에 대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행이란 이렇듯, 바쁜 걸음 사이에 반드시 '쉼표'를 찍어주어야 그 여운이 더 깊어지는 법입니다.
둘째 날, 여수: 중년의 낭만은 밤에 더 깊어진다
▶ 테마: "노래가 현실이 되는 곳, 진짜 '어른'의 낭만을 만나다"
우리 부부의 코스 (저녁): 밤바다를 가로지르는 하늘길, 해상케이블카
여수에서의 둘째 날은 늦잠과 함께 여유롭게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저물기를 기다려 여수 해상케이블카에 올랐습니다. 반드시 해가 진 뒤, 야경을 즐길 수 있는 시간에 타라는 조언을 따르길 참 잘했다 싶었습니다.
발아래로 보석처럼 반짝이는 돌산대교와 항구의 불빛,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검은 바다. 왕복 25분 남짓, 하늘을 가로지르는 동안 저희 부부는 창밖 풍경에 넋을 잃었습니다.
왜 모두가 그토록 '여수 밤바다' 노래를 흥얼거리는지, 그제야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젊은 날의 사랑 노래가, 이제는 중년 부부의 가슴에도 깊은 낭만으로 파고들더군요.
50대 부부의 꿀팁 (저녁): 낭만포차를 지나, 현지인의 맛집을 찾다
케이블카에서 내리자, 젊음의 열기로 가득한 낭만포차 거리가 저희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인파와 호객 행위는 저희 부부에게는 조금 벅차게 느껴졌습니다. 저희가 찾던 낭만은 이런 소란스러움과는 조금 다른 결이었지요.
잠시 고민하던 저희는 발길을 돌려, 택시 기사님들이나 현지인들이 진짜 '여수삼합'을 먹기 위해 찾는다는 연등천 포차거리로 향했습니다. 낭만포차가 관광객을 위한 번화가라면, 이곳은 여수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녹아 있는 진짜 '골목'이었습니다. 천변을 따라 늘어선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해물삼합을 주문했습니다.싱싱한 돌문어와 관자, 새우가 뜨거운 불판 위에서 고소한 삼겹살, 그리고 잘 익은 묵은지와 함께 지글지글 익어갔습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신선한 해물삼합에 기울이는 소주 한 잔. 이것이 바로 저희 부부가 찾던 진짜 '중년의 낭만'이었습니다.셋째 날, 군산: 흑백사진 속에 담긴 시간 위를 걷다
▶ 테마: "빛바랜 풍경 속에서, 우리 부모님의 시대를 추억하다"
50대 부부의 꿀팁 (시작): '통합권' 한 장으로 시작하는 시간여행
군산에서의 마지막 날, 저희의 여행은 '시간여행'이라는 테마에 꼭 맞게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성인 1인당 3,000원짜리 통합 입장권을 구매하는 것이 군산 여행의 가장 지혜로운 첫걸음입니다. 이 티켓 한 장이면 근대미술관(구 일본 제18은행), 근대건축관(구 조선은행) 등 주변의 핵심 근대문화유산을 모두 둘러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박물관을 먼저 관람하며 군산의 전체적인 역사를 이해하고 나면, 이후에 마주하는 거리와 건물들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 부부의 코스: 빛바랜 풍경 속, 부모님 세대를 추억하며
박물관을 나선 저희 부부는 마치 흑백사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기분으로 군산의 거리를 누볐습니다.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경암동 철길마을의 낡은 판잣집들. 1944년 일제강점기, 신문 용지를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들어진 이 철길 옆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며 형성된 마을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교복을 빌려 입고 사진을 찍는 관광 명소가 되었지만, 그 좁은 길을 걸으며 저희는 잠시 저희의 부모님 세대가 겪었을 고단한 삶을 떠올렸습니다.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구)군산세관은 서양 고전주의 양식의 아름다운 외관과 달리, 우리 민족의 쌀을 수탈하던 아픈 역사의 증인이기도 합니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은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에서는 이국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경내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과 일본 조동종의 과오를 참회하는 비석을 보며, 아픈 역사도 외면하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는 깊은 여운을 얻었습니다.우리 부부의 코스: '8월의 크리스마스' 그리고 우리의 시간
무거운 역사의 길을 걷던 저희 부부의 발걸음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인 초원사진관 앞에서 잠시 가벼워졌습니다. 영화 속 모습 그대로 보존된 사진관 안에는 주인공들의 사진과 낡은 소품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스크린 속 애틋했던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며, 아내와 저는 서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켜켜이 쌓인 우리의 시간 또한 한 편의 영화와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잠시 따뜻한 추억에 잠겼습니다.
50대 부부의 꿀팁 (마무리): '이성당'의 지혜로운 이용법
군산 근대역사여행의 마무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이성당'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명성만큼이나 긴 줄이 늘 부담스러운 곳이지요. 여기서 저희 부부만의 꿀팁을 알려드립니다.
이성당은 바로 옆에 붙어있는 본관과 신관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길게 줄을 서는 곳은 단팥빵과 야채빵을 파는 본관뿐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 빵에 대한 고집이 없다면, 바로 옆 신관으로 가보세요. 훨씬 더 쾌적하고 여유로운 카페 분위기에서 다양한 신메뉴 빵과 커피를 즐길 수 있습니다. 저희 부부는 신관에서 느긋하게 커피 한 잔과 빵을 즐기며, 이번 여행의 마지막 여유를 만끽했습니다.
다시, 함께 채워갈 여행의 빈 페이지
아이들 이야기로 가득했던 지난 30년의 여행. 이제 아내와 나의 이야기로 다시 채워갈 시간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젊었을 적에는 미처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는 시간. 이번 전라권 여행은 저희 부부에게 그런 선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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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달릴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 걸음을 늦추니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얼굴에 늘어난 주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함께 마시는 차 한 잔이 얼마나 따뜻한지, 말없이 손을 잡고 걷는 길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 여행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느린 걸음'의 행복을 찾아 떠나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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